블록체인은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

블록체인은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까?

written by 돌비콩

<PROLOGUE>

모두가 맹목적 믿음을 바탕으로, 씬의 성공을 막연하게 그리던 호황기가 있었다.

“야, 엄청나게 투자받고, 첨단 기술이 도입되고, 굴지의 인재들이 뛰어드는 시장이, 성공 못할 것 같아? 뭐라도 되지 않겠어?”

안타깝게도, 최근 침체기를 맞고 있는 시장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씬을 향한 믿음과 신념은 흔들리고, “정말 크립토가 신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같은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글은 ‘과연 탈중앙화와 블록체인 그리고 웹 3가 인류에게 정말 필요하고 가치가 있는지, 실현이 가능한 아이디어인지, 인터넷상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다른 대안은 없는지’ 등의 본질적 고민을 통해 나오게 된 글이다.

“야 돌비콩, 너 사탄 들렸어?”

<TL;DR>

  • 인간은 본질적인 이유로 완전한 탈중앙화를 이룩할 수 없으며, 모든 민주적 조직 구조는 대리자를 내세우는 중앙화(과두정)로 귀결한다.
  • 민주주의, 대의제의 핵심은 조직이 얼마나 신축적이고 유연한가에 있다.
  • 인류의 역사는 중앙화와 탈중앙화 사이를 순환하되, 조금씩 진보(민주화)하는 나선형 구조를 그리고 있으며, 블록체인은 구조적으로 중앙화에 높은 신축성을 부여할 가능성이 높은 인프라이다.
  • 다만 블록체인 패러다임이 매스 어답션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중이 주체적인 일반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모멘텀’이 필요하다.

<목차>

  1. 민주주의와 블록체인 거버넌스
  2. 모든 민주적 조직은 과두정으로 귀결한다
  3. 리더 없는 대중은 존재할 수 있는가?
  4. 탈중앙화라는 유토피아(Utopia;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
  5. 대의제의 핵심, 신축성
  6. 빅테크 디스토피아의 제동장치, 블록체인
  7. 역사는 순환한다
  8.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1. 민주주의와 블록체인 거버넌스

민주주의는 국민의 뜻에 따라 운영됨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블록체인 거버넌스 철학 역시 마찬가지다. 블록체인 그리고 웹 3.0은 구성원이 중앙에 빼앗긴 권리를 돌려받아, 자기(自己)를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는 구조를 지향한다.

문제는 다수의 개인은 ‘셀프 거버넌스(Self-Governance)’나 ‘셀프 커스터디(Self-Custody)’ 같은, 책임 있는 권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와 금융중개기관 등 ‘중앙화 주체’에게 개인이 이양한 권리를 되찾아옴은, 의무 역시 함께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스스로 통제하여 진정한 자기를 얻어내려는 수요는 많지 않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은 권리만을 누리고 싶어 할 뿐, 책임까지 원하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사람들은 빨간 약을 먹고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source:The Matrix(1999)

온체인 거버넌스가 갈 길은 멀다. 다들 독려하는 실제 선거의 투표권도 절반가량이 포기하는데, 거버넌스 안건 하나하나 관심 갖고 투표하는 게 가능할까? 친히 집까지 배달되는 선거 책자조차 확인하지 않는 것이 현실의 정치 아닌가.

자기 지역구 국회의원에 대한 투표를 오로지 두 개의 정당으로만, 편리하게 택할 수 있다는 것은 양당제의 최대 장점이다. 번거롭게 다른 요소를 고려할 필요 없이, 두 가지 정당 선택지 이외의 정보를 전부 노이즈화하고 제거하여 결정장애로 인한 불안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사회에서 과연 거버넌스가 제대로 동작할 수 있을까. 과연 대중은 그런 피로도를 감당할 수 있는가? 아무리 열정 넘치는 개인이라도, 컨베이어 벨트 위로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쏟아지는 그것들을 계속해서 분류해 낼 수 있을까. 매우 회의적이다.

정보 과잉의 시대다. 빠른 속도로-끊임없이-마구 밀려들어오는 컨베이어 벨트의 물품을 겉포장만 보고 분류하고 스캔하며 넘겨버릴 수밖에… 결국 끝없이 돌아가는 벨트를 쉬게 하지 않는다면, 모던 타임즈의 찰리처럼 그것에 압도되어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2. 모든 민주적 조직은 과두정으로 귀결한다

블록체인의 거버넌스와 웹 3.0의 정치철학을 심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선, 정치학 고전으로 꼽히는 로베르트 미헬스의 ‘정당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 사민당에서 정치를 배운 그가, 결국엔 무솔리니 휘하로 들어가 파쇼에 귀의한 점은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미헬스는 민주적 토대 위에 있는 모든 조직은 결국 강력한 과두정(寡頭政;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의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 체제)으로 귀결한다고 주장한다.

“조직을 말하는 것은 곧 과두를 말하는 것이다.” — 로베르트 미헬스, source

과거 정당의 대부분 이념정당이었으나, 현대 정당은 국민 정당을 지향한다. 보다 원활한 정권 획득을 위해, 특정한 이념과 계층의 대변이 아닌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형태로 변모한 것이다. 그 결과로 현대사회에는 수많은 당원을 거느리는 거대정당, 국민정당, 포괄정당이 나타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당의 규모가 매우 커지면, 당원들이 안건마다 숙의하는 형태의 의사결정 구조를 갖기가 쉽지 않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관료제이며, “관료제가 지속되다 보면 과두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라는 주장이 바로 미헬스의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이다.

“선출된 자가 선출한 자들을 지배하고, 위임(Delegation) 받은 자가 위임한 자들을 지배한다.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 조직 안에서 과두정이 만들어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유기적 경향이다.”

선출된 자, 위임받은 자, 대의원(代議員)이 주요 안건들을 결정하게 된다면 과두정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다만, 이 같은 형태는 과두정이 아니라, 효율적인 정당 민주주의 형태인 ‘대의제’라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안건을 다루다 보면, 위임받은 자와 위임한 자 사이의 의견이 다른 경우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선출되고 위임받은 대의원이 민의와 다투고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하여 나머지를 지배할 때다. 대의제가 과두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를 지적했을 때, “일상적인 의정 등 시시콜콜한 모든 거버넌스 안건에 대해, 모든 이의 의견을 취합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라는 너무 현실적인 반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 집중과 과두정은 무리 지은 조직이라면 반드시 겪는 필연이며, 과두제의 ‘철칙’이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3. 리더 없는 대중은 존재할 수 있는가?

지휘관을 잃은 군대, 대통령이 없는 나라, 리더 없는 조직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우두머리가 없는 조직인 DAO(탈중앙화 자율조직)를 생각해보자. 정녕 완전히 수평적인 DAO를 본 적이 있나? 아니,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 조직을 본 적 있나? 구체적인 명패만 없을 뿐이지, 무리를 이끄는 이는 어디든 존재한다.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대중 사이에서도 리더는 생기는 법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Eugène Delacroix, 1830)

주인의식,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과연, 모든 구성원이 주인인 조직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차등과 위계와 계급과 계층과 분별과 차이와 구분과 구별과 친소와 장유는, 인류와 분리시킬 수 없는 본성적이고 본질적인 사회 구성요소이자 오히려 인간사회를 보다 제대로 작동하도록 도운 효율성 그 자체가 아닌가.

소수의 전제적 지도자 구심으로 측근들이 포진하고, 당 의원과 당료 조직이 수직 계열화되는 현상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며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과두적인 면모, 사당화 경향이 없었던 정당은 역사적으로 거의 찾기 어렵다.

비탈릭의 이더리움, 도권의 루나, 크로네의 팬텀… 블록체인 성장과정에 있어서 정치적 중앙화와 내러티브 드라이버들이 존재함은 필연이 아닌가? 다소 궤는 다르지만, 비트코인 성장 과정에서도 사토시, 채굴자/코어 진영, 마이클 세일러 등과 같은 정치적 구심점과 중앙화 요소가 있지 않았나? 요는, 이런 부분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인간 본연에서 비롯한 당연한 현상이라는 점이다.

4. 탈중앙화라는 유토피아(Utopia;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

혹자는 인류의 역사가 계급사회에서 평등사회로, 왕정독재에서 민주주의로 흘러온 것처럼, 인류의 탈중앙화가 필연적 흐름이라고 이야기한다. 블록체인의 ‘발명 혹은 발견’이 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다만, 변화가 꼭 진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블록체인이 인류를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

VHS와 베타맥스의 비디오테이프 표준 전쟁에서 열등한 VHS가 살아남은 것처럼, 세상이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08년도 금융위기나 페이스북 개인정보 유출 사태 등 중앙화로 인한 폐단이 부각되어, 탈중앙화와 권력 분산에 대한 열망이 커졌고 블록체인이 나타났다. 블록체인은 대중적 탈중앙화 욕구를 해소하는 도구로 기능하고 있다. 만약 다른 수단이 민주화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면, 이런 시대적 패러다임이 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번의 그 바람은 블록체인이라는 형태로 불어온 듯하다.

“월가를 점령하라”, source:NBC

웹 3.0 온체인 거버넌스가 작동하는 이상적인 모습은 모든 토큰 홀더가 모든 프로포절에 고민하여 의사결정을 내리고 참여하는, 숙의의 형태일 것이다. 이 같은 체계는, 홀더의 참정 의식이 제반해야 이뤄질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직접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중우정치로 빠지거나, 정치적 무관심을 유발해 공백과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당연히 이룰 수 없는 이상이다.

탈중앙화를 중시하는 크립토 씬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패권적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아이러니와, 주노(Juno) 거버넌스 사태에서 보여준 면면들. 블록체인은 정치적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 탈중앙화가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가치일까? 인간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아닌가.

인간과 위계는 뗄 수 없는 개념 아닌가 하는 고리타분한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탈중앙화는 꼭 추구해야만 하는 지고한 가치인가? 과연 중앙화와 철인의 통치는 중우정치보다 열등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가.

예컨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서 제렌스키가 보여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생각해보자. 그의 리더십은 자국민을 단합시켰고 국제사회의 정신적 지지와 실질적 지원을 만들어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과연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분산된 탈중앙화 리더십이 중앙화의 그것보다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을까.

스마트 컨트랙트 플랫폼 중 가장 탈중앙화 됐다고 평가받는 이더리움 역시, 상당한 중앙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더리움 하면, 비탈릭을 먼저 떠올리는 정치적인 중앙화 문제부터 스테이킹 물량, 노드 집중화 등 실체적 중앙화까지. 과연 탈중앙화는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인가. 리도 파이낸스의 점유율이 30%가 넘고, 상위 3개 노드(리도, 코인베이스, 크라켄)가 전체 비중의 과반을 차지하니 말이다.

이더리움 스테이크 노드 순위, source

비트코인은 또 어떠한가? 물론 점차 완화되는 추세지만, 중국 채굴장 폐쇄 이전만 해도 비트코인의 해시레이트 집중화는 매우 심각했고, 현재도 Foundry USA, Antpool 등 몇몇 채굴업체가 상당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비트코인이 전하는 사상에 심취하여, 풀노드를 돌리는 극소수의 비트코이너들이 존재하나, 대부분 홀더의 비트코인은 중앙화 거래소에서 장부로만 움직이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서, 중앙화 거래소에서 비트코인을 보관·매매하는 사람들을 어리석거나 덜 떨어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대부분의 투자자는 단순히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토큰을 사는 것일 뿐, 탈중앙화 이념의 설파 같은 고매한 일을 위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며 비난받아야 하는 사고방식인가? 당연히 아니다. 그들도, 우리도, 틀리지 않았다.

5. 대의제의 핵심, 신축성

“지도자들의 권력은 무제한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으로 리더는 대중의 의지에 종속되어야 하며, 대중의 심기를 거스르는 지도자는 물러나야만 한다. 리더는 대중에 의해 언제라도 해임되고 대체될 수 있다.” — 정당론, 로베르트 미헬스

우리가 판단해야 되는 부분은 중앙화 요소 자체가 아니라, 중앙화 조직의 ‘신축성’에 있다. 이는 당원의 의견, 요구, 바람 등을 신축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통해, 리더십을 구축했느냐가 핵심이다.

또한, 민주적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권력은 ‘대중의 의지’에 종속되어야만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지도자의 경우 언제든 교체할 수 있고, 권력을 다른 이에게 위임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체계는 반드시 그러한 구조적 신축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구성원들의 의견과 가치가 대리자(리더)라는 구심으로써 표상하되, 구성원들 대다수와 맞지 않는 선택을 했을 때, 능동적으로 언제라도 문제를 삼아 탄핵하고 교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지, 그러한 탄력성과 신축성을 확보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인간은 중앙화 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를 분명하게 인지 그리고 인정하고, 방향성을 설정해야 한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탈중앙화가 아닌 중앙 권력 구조의 민주적 정교화다. 우리의 권력을 중앙에 위임하면서도, 나의 권력이 오남용 될 것이라는 불안함 없이 발 뻗고 잘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이 중요하다. 필연적 중앙화 요소는 인정하되, 그러한 중앙화에 대한 견제, 신축성, 탄력성이 얼마나 보장되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6. 빅테크 디스토피아의 제동장치, 블록체인

블록체인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없으며,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디스토피아’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블록체인 체계에서는 기존보다 더욱 탄력적으로 중앙화 구조가 운영될 ‘가능성’이 있다. 블록체인을 인프라로 한 체계는 기존보다 신축적으로 동작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AI와 로봇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은 하루가 달리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인류가 더 이상 노동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산업혁명 시대에 생산수단의 소유를 금지한 것처럼, ‘플랫폼 규제’, ‘로봇세’, ‘인공지능세’ 등 아득한 생산성을 자랑하는 신기술을 제한할 논의들이 벌써부터 진행되고 있다.

미래사회 보고서(2090년 미래사회 계급 전망), 서울대 유기윤 교수팀

만약 첨단 기술 리스크가 적절하게 통제되지 않는다면, 미래사회엔 극단적인 계급구조가 발생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미래사회에는 플랫폼 등 기술을 소유한 기업인이 0.0001%의 최상위층이 되고,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대중은 피지배 계급이 되어 아무런 직업도 경력도 갖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고 한다. 빅테크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충분히 실현 가능한 ‘디스토피아’다.

블록체인은 그 기본 속성인 개방성과 무허가성, 무신뢰성을 바탕으로 인터넷상의 소유권과 주권을 투명하게 보장해낼 수 있다. AI와 빅데이터 등 첨단 과학이 범람할 미래에 블록체인이라는 인프라는, 거대 권력이 될 수 있는 플랫폼과 빅테크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최소한의 제동장치일지도 모른다. 미들맨, 거대 빅테크 기업의 소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필연적 존재를 인정하며 사악해질 수 없는 구조(Can’t Be Evil)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Can’t Be Evil.” Blockstack Ad, source

7. 역사는 순환한다

정치와 경제의 발달 단계를 보면 알 수 있듯, 메타는 결국 순환한다. 큰 정부와 작은 정부는 돌고 돈다. 자유방임주의의 고전 자본주의부터 수정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거쳐 그리고 정부 역할을 강조한 자본주의 4.0까지…

역사도 반복한다. 과두정, 참주정, 민주정은 순환한다. 과두정에서는 리더가 생기고, 이 같은 권력의 중앙화는 참주정으로 이행한다. 독재를 행하는 참주정은 고이고 썩어 폐단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민중은 썩어버린 참주정을 전복한다. 그렇게 다시 민주정이 도래한다. 지금은 민주화 열망의 내러티브가 흐르는 시기다.

Michio Kushi’s Spiral of History, source

주역(周易) 등의 동양 철학이나 야만의 시대-영웅의 시대-문명의 시대가 반복된다는 비코의 역사관, 헤겔의 변증법에서 보듯, 인류 역사의 상당 부분은 순환사관으로 설명할 수 있다. 탈중앙화가 미덕인 현재를 거쳐, 이후 다시 중앙화의 필요성이 각광받는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

다시 권위주의 정부 혹은 군사독재의 시기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순환할 뿐. 그럼에도 조금씩 나아간다. 보이지 않는 계급(계층)은 현재도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카스트제도, 노예제도 등 신분제가 있었던 과거보다는 훨씬 더 다수의 민중이 살만한 사회가 되지 않았나. 역사는 끊임없이 정(正)과 반(反)을 순환함과 동시에, 합(合)을 이루며 조금씩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순환하되, 진보하는 형태의 ‘나선형 순환사관’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웹 3가 개인의 자유를 더욱 보장해주는 탈중앙화 형태였다면, 어쩌면 웹 4는 그를 보완하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재중앙화(Recentralisation)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삶은 나선형으로 나아갈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8.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역사적으로, 민초에 불과했던 일반 대중이 강력한 참주정을 타파해낼 수 있었던 원천은 개별 구성원들의 초의지(super-ego)나 사회적 계약의 발현 따위가 아니다. 또한 이론적이고, 이념적이며, 사상적으로 다수를 선동한 무언가가 혁명의 기초가 됐기 때문도 아니다. 혁명의 근간에는, 그러한 행동을 통해 자신 그리고 자신이 끔찍하게 아끼는 가족과 그 이웃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의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탈중앙화 패러다임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직접 이 같은 것을 일반의지로서 느낄 수 있는 환경에서야말로, 진정한 대중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인류는 크립토 중흥의 역사적 사명과 목적 따위를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 역시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하다. 그 자체로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세상이 더 퇴보한다면 탈중앙화니, 블록체인이니, 그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실존주의를 주창한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그저 세상에 던져진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기(自己)의 존재 이유마저 만들어 나가야만 하는, 무한한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 때때로 인간은 무한한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기도 한다. 수많은 인류가 주체성과 선택권 따위는 버리고, ‘파란 알약’을 먹어 더욱 편한 생활양식을 택한 걸 보라. 사르트르를 이걸 ‘자기기만’이라고 했던가.

“decentralization is worth whatever the market decides it’s worth.”

대중이 탈중앙화를 가치있는 것이라고 인식할 때, 비로소 탈중앙화엔 가치가 부여된다. 탈중앙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블록체인이 왜 필요한지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계몽하고, 설파하며, 가르치는 에반젤리즘(evangelism)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대중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필요성을 느껴 일반의지로서 이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모멘텀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사실 굉장히 무기력하고 파괴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현대 금융 시스템의 수명이 다했음을 몸소 느끼는 사람만이 비트코인을 노아의 방주로 받아들인다. 다음의 모멘텀은 무엇이 될까. 틱톡 사태와 같은 대규모 개인정보 오용, 달러의 붕괴, 국가부채 폭탄 폭발…

수많은 사람들이 08년도 금융위기에서 셀프 커스터디의 필요성을, 페이스북 개인정보 유출 등 일련의 사태에서 온라인 주권의 필요성을 일반의지로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블록체인을 통한 인간 실존은, 이것이 선결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돌비콩고팍스 리서치 파트너. ‘돌비콩의 코인정복’ 텔레그램블로그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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